'햇볕정책'론

김대중 대통령은 '햇볕정책'으로 통칭되는 대북 포용정책(對北包容政策)을
통치철학의 핵으로 삼고 있다.
햇볕정책이란 북한에 따뜻한 볕을 쬐어 스스로 두터운 외투를 벗게 한다는
연공작전(軟攻作戰)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최근 김대중 대통령은 이 정책의 틀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
'냉전체제의 타파' 쪽으로 통일정책의 가닥을 잡고 있다.
즉 김대통령은 민족 내부적으로는 북한에 대해 도울 것은 모두 돕고, 북한으로 하여금
전쟁 포기선언을 받아내는 동시에, 외부적으로는 한반도의 분단에 책임이 있는
4대 강국의 노력을 촉구하고 있다.

물론 김대통령의 구상은 획기적이며, 원대하다. 획기적이라는 말은
김대통령의 뜻대로만 된다면 우리 민족이 원한 맺힌 분단을 극복하고 대망의
통일을 달성하게 된다는 뜻에서이다.
원대한다는 말은 민족의 숙원을 단숨에 해결하고 역사에 길이 남을 대통령이 되겠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는 뜻에서이다.

필자는 김대통령이 획기적이고도 원대한 대북정책이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꿈속에서도 그리던 통일의 날이 와서 국토와 민족을 동강낸 원한의 철책선을 걷어내고
남북의 동족들이 얼싸안고 두둥실 춤추는 장면을 상상만해도 마음이 들뜬다.

그러나 모든 사회 현상에는 상대가 있다.
사회 부문의 정책이 상대방의 본질과 성격에 따라 위상이 좌우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더구나 대북 정책은 사회 부문의 정책 가운데 가장 명료한 원칙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따라서 상반된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북한 정권을 적(敵)으로 볼 것인가, 동지(同志)로
볼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이 문제는 적이면 적이고, 동지면 동지이지 적인 동시에 동지일 수는 없는 양자택일(兩者擇一) 사항이다.

대남 고정 간첩, 공산 테러리스트, 자생적 공산주의자, 무조건적 평화주의자, 일부 전보적 지식인,
공산주의 가문의 후손, 자본주의의 부정부패에 신물이 난 사람들은 북한을 동지로 볼 것이다.

그러나 월남 피난민, 6·25전쟁에 참전했던 용사, 대공전선에 종사하는 요원,
대한민국에 귀순한 북한 고관 및 인민, 해방 후부터 좌우익의 대결구도 속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해 피땀을 흘려온 사람은 북한을 적으로 볼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한반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미일중러(美日中露) 등 4대 강국이 북한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한다.

이 문제는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기는 하지만 국제적 역학관계의 엄연한

현실이므로 알러지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냉철하게 성찰해야 한다.

미국은 앞으로 페리 보고서를 토대로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준비하는 등

치밀한 작전으로 나오고 있다. 일본은 북한 정권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북한의 무력 동향에 대해 가장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 중화민족이란 자존심이 매우 강한 중국은 외교적으로 북한을 지지하고 있다.
공산주의의 패망을 겪은 러시아는 한국과 북한을 저울질하는 외교 노선을 취하고 있다.

끝으로 우리는 북한 자체의 노선(路線)을 주목해야 한다.
북한은 한편으로는 전쟁을 준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를 외치는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나라다. 야누스의 얼굴을 한쪽으로만 보면 진리의 반쪽을 대하는 결과를 낳는다.
여기에 대북정책의 딜레머가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헌법과 조선노동당 규약에 엄연히 공산화 통일(共産化統一)을 지향하고 있다.
북한 당국자들은 내부적으로는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 미사일 시험 발사, 무장 간첩 침투,
땅굴 굴착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전쟁 준비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은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의 미소를 머금고 미국과의 수교를 위해 골몰하고 있다.
북한 당국자들은 이미 '벼랑끝외교'로 효과를 톡톡히 본 고수(高手)들이다.
그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으면

주한 미군의 철수를 필사적으로 관철하려 할 것이다.

이 경우에 미국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지상군을 남한에 주둔시킬 명분이 약해진다.
가령 남한에서 미지상군이 빠져나간다 하자. 그들이 없는 남한의 군사력은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
군사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이렇게 되면 북한의 고정간첩과 자생적 공산주의자들도
"때는 왔다!"고 외치며
봉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은 깨지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모두 종합하면 북한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채찍을 마련해둔 채 당근으로 달래는 미국의 대북정책은
완벽에 가까운 수순(手順)이다.
물론 당근은 식량지원 내지는 수교이고, 채찍은 경제 제재 또는 군사적 보복을 뜻한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이며, 치밀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북한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에 깔고
민족의 비원인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획기적이고도 원대한 구상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빅딜의 형평성(衡平性)에 대한 의문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남한이 북한을 향해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지원한다면 적어도 북한에 대하여
공산화 통일의 포기를 받아내야 한다.
이것은 지도자 동지의 일시적 언약이 아닌 사회주의헌법과 조선노동당 규약의 개정으로 이어져야만
확실한 방책이 될 것이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뿐만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만약의 사태'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단호한 대응책이 보이지 않는다.
북한에 대해 줄 것은 많이 주는 자세는 동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시이지만
상대방이 갑자기 위험한 행동으로 나오면 어찌할 것인가?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거시적(巨視的)으로는 밝고 굳센 측면이 있지만,
미시적(微視的)으로는 응달지고 엉성한 구석이 엿보인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밝고 굳세게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너무 앞서가다가 응달지고 엉성한 곳에서 독균(毒菌)이 번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